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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고향은
포천의 명인들
성  명 :
이지함(李之菡)  1571(중종12)~1578(선조 11)
프로필 :
조선시대 학자◦기인(奇人). 포천현감을 역임했다. 자(字)는 형백(馨伯)◦형중(馨仲), 호는 토정(土亭)◦수산(水山), 본관은 한산(韓山),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6대손, 이조판서를 추증받은 이장윤(李長潤)의 손자, 우봉현령(牛峰縣令) 치(穉)의 자. 우의정 김극성(金克城)의 외손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형 지번(之蕃)에게 글을 배웠으며, 후에는 서경덕(徐敬德)의 문하로 들어갔다. 경사자전(經史子傳)에 통달하였으며, 수학에도 정통하였다. 또한 항상 주경궁리(主敬窮理)를 학문의 방법으로 삼았다. 당대의 대학자인 이이(李珥), 성혼(成渾), 송익필(宋翼弼) 등과 학문적인 교류를 가졌으며, 조헌(趙憲)으로부터는 스승으로서의 예우를 받았다. 생각과 행동이 초탈하며 파격적이어서 기이(奇異)한 일화를 많이 남겼는데, 서울 마포강변에 흙으로 집을 짓고 밤에는 거기서 쉬고 낮에는 평평하게 만든 토실(土室)위를 정자로 삼아 지내면서 토정(土亭)이란 호를 사용한 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1573년(선조6)에 탁행(卓行)으로 천거되어 포천현감이 되었다. 재직 중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알아서 많은 생명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포천은 원래 땅이 척박하여 풍년이 들더라도 추수 후 공사채(公私債)를 갚고나면 남는 양식이 거의 없는 지경이었다. 이지함은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서 소속이 없는 무주(無主)의 해도(海島)를 얻어 굶주린 백성을 모아 고기를 잡고 소금을 구워서 많은 식량을 마련하기로 계획하고, 전라도 만경현(萬頃縣)에 있는 양초주(洋草洲)와 황해도 풍천부(豊川府)의 초도정(椒島井)를 빌리고자 조정에 상소를 올렸으나 조정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이지함은 포천현감을 사직하였다. 1578년(선조11) 아산현감(牙山縣監)에 임명 되었을 때는 집 없고 땅없는 부랑인 들이 끼치는 민폐를 살피고 무고한 백성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힘썼다. 특히 현대의 재활원이라고 할 수 잇는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관내의 걸인을 수용하고 그들에게 수공업을 가르쳐 생계를 세우게 했으며, 무능자에게는 짚신짜기를 가르쳐 의식(衣食)의 길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그는 노약자와 굶주린 백성들을 구호하는데 힘쓰다가 죽엇다.
이지함은 그의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살았으며 복서(卜筮), 의약, 천문, 지리, 음양술서(陰陽述書)에 모두 통달하였다. 그에 대하여는 기지◦예언◦술수에 관한 많은 일화가 전한다. 역서(曆書)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저서에는 『농아집(聾啞集)』이 있으며, 『토정집(土亭集)』은 그가 죽은 후 현손인 경주부윤(慶州府尹) 이정익(李禎翊)에 의해 간행되었다. 당해 성리학의 대가인 조식(曺植)이 마포로 찾아와 그를 도연명(陶淵明)에 비유하였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1713년(숙종39)에 학덕이 인정되어 이조판서에 추종되었으며,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과 보은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성  명 :
이덕형(李德馨)  1561(명종16)~1613(광해군 5)
프로필 :
조선시대 문신 ◦ 학자. 포천읍 자작리에서 출생 ◦ 성장 하였다. 자는 명보(明甫), 호는 포옹산인(抱擁散人) ◦ 쌍송(雙松) ◦ 한음(漢陰), 본관은 광주(廣州). 좌의정 극균(克均)의 5대손, 지중추부사 민성(敏聖)의 자,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이조참판 박의(朴宜)의 사위이다. 포천읍 자작촌(自作村 : 自作里)을 세거지로 한 백사 이항복(李恒福), 봉래 양사언(楊士彦)과 절친하였으며 용연서원(龍淵書院)에 제향되고 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학문에 정진하여 1580년(선조 13) 20세의 나이로 별시문과 을과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재직하면서 선조의 눈에 들어 서적을 하사받는 특전을 누렸으나 장인 이산해가 도승지로 재임하고 있을 때라 오해의 소지가 있음에 곧 사양하였다. 이어 홍문관정자를 배수 받았고 1582년(선조 15)에는 조사(詔使)로 온 명나라 사신 왕경민(王敬民)이 그의 소문을 듣고 만나려 하였으나 사사로이 만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자 왕경민은 그의 인격이 출중함과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담은 글귀를 지어 전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한 후 1548년(선조 17) 서총대(瑞葱臺)에서 베풀어진 응제(應製)에서 장원하였으며 이후 부수찬, 평안도암행어사, 정언, 부교리, 이조좌랑, 성균관직강을 역임하였다.
1588년(선조21)이조정랑으로 일본의 사신 겐소(玄蘇) 등을 접대하였으며 1590년(선조 23) 동부승지, 우부승지, 부제학, 대사간, 대사성을 거쳐 이듬해 예조참판으로 대사성을 겸하고 다시 겐소, 야나가와(柳川調信)와 등과 용인에서 화전을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진을 점령한 후 북상하던 왜장 고시니(小西行長)가 충주에서 그를 만날 것을 요청해 오자 이를 수용하여 혼자 적진을 향해 들어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선조가 신의주로 피난하던 중 평양에 이르자 왜군은 이미 평양에 도착하여 화의를 요청함에 단독으로 겐소와 대담하여 대의로써 그들의 침략을 공박하였다. 이후 정주까지 왕을 호종하고 명나라에 청원사(請援使)로 파견되어 명의 원조를 구하였으며 돌아와서는 대사헌을 지낸 후 한성판윤으로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接伴官)이 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와 행동을 같이 하였다. 이듬해 병조판서를 지낸 후 이조판서로 훈련도감당상(訓鍊都監堂上)을 겸하였고 1595년(선조 28) 경기도를 비롯하여 황해 ◦ 평안 ◦ 함경 4도의 체찰부사를 역임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서는 서울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명의 어사 양호(楊鎬)를 설득하여 뜻을 이루었으며 명군과 함께 울진까지 동행하여 그들을 위로하였다. 또 이순신(李舜臣), 명의 제독 유정(劉綎)과 함께 순천에서 고시니의 군사를 대파하기도 하였다. 1598년(선조 31)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으로 훈련도감도제조(訓鍊都監都提調)를 겸하였고 이듬해 홍여순(洪汝諄)이 유정(劉綎)과의 관계를 모함하여 벼슬의 뜻을 버리고 10여 회에 걸쳐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1601(선조 34) 행판중추부사로 경상 ◦ 전라 ◦ 충청 ◦ 강원 4도의 체찰사를 겸하여 민심의 수습과 군비정비에 경주하는 한편 대마도를 정벌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02년(선조 35) 40세에 영의정에 올랐으며 1604년(선조37) 양란때의 공을 들어 이항복이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할 것을 주청했으나 시기하는 무리들의 반대와 본인의 고사로 책록되지 못했다.
1606년9선조 39) 영중추부사로 옮겼다가 1608년(선조 41)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재차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이때 임해군(臨海君)의 고변이 잇어 삼사와 모든 대신들이 법대로 처리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항복과 함께 의(義)로써 처단하는 것보다는 은(恩)으로써 감싸줄 것을 주청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로 삼사(三司)에서 영창대군을 극형에 처할 것과 폐모론을 일으키자 이항복과 함게 극력 반대하였으나 모함을 받아 삭탈관직 당하여 양평에서 은둔중 병사(病死) 하였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남인출신으로 북인의 영수 이산해의 사위가 되어 중도론을 견지하다가 후에 남인계열에 가담하였다. 인조 즉위 초에 아들 여규(如圭)의 주청에 의해 복관되었으며 포천의 용연서원과 함께 상주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고 있는데 1829년(순조 29)과 1831년(순조 31) 근암서원과 안동의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영정을 봉안하였다. 이석창(李石蒼)은 그를 오리(梧里) 이원익(李原翼), 필운(弼雲) 이항복과 함께 혼조삼이(昏朝三李)라고 평하였는데 이는 3인이 광해군때 진충(盡忠)을 하고도 참소를 입었기 대문이다. 글씨에 뛰어나 『근묵(槿墨)』에 유필이 남아있으며 저서로 『한음문고(漢陰文稿)』가 전한다. 묘는 양평 양서면 목왕리(木旺里)에 있는데 1985년 경기도 기념물 89호로 지정되었으며 신도비문은 용주(龍洲) 조경(趙絅)이 지었고 묘지명은 이항복이 지었다.
 
 
성  명 :
이항복(李恒福)  1556(명종 11)~1618(광해군 10)
프로필 :
조선시대 문신. 포천에서 거주했고, 가사년 금현리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호는 백사(白沙)◦필운(弼雲)◦동강(東岡)◦청화진인(淸化眞人)◦素雲, 본관은 경주(慶州). 고려의 문하시중 이제현(李齊賢)의 후손, 성무(成茂)의 증손, 예신(禮臣)의 손, 참찬 몽량(夢亮)의 자, 최륜(崔崙)의 외손, 권율(權慄)의 사위이다.
8세에 이미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아버지 몽량이 칼과 거문고를 주고 글을 지으라 하니 “칼은 장부의 기상이요 거문고는 천고의 소리를 간직했노라”하니 듣는 사람 모두가 큰 그릇이 될 줄 알았다. 또 성격이 활달해서 놀기를 좋아했고 장난이 심했는데, 9세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커가면서 기골이 장대하여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1580년(선조13)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를 거쳐 검열이 되었다. 당시 이이의 추천으로 이덕형과 함께 선조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다. 그리하여 1587년(선조20) 사가독서를 차지하는 영예를 누렸으며, 저작◦박사◦전적◦정언◦수찬을 역임하고 1589년(선조 22) 이조좌랑에 올랐다. 그해에 에조좌랑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발생하자 왕명을 받들고 문사랑(問事郞)으로 입시하여 매우 복잡한 사건을 명쾌하고 공정하게 처리하였다. 159년(선조23)직제학을 거쳐 동부승지로 승진되었으며, 정여립 사건을 다스린 공으로 평난공신 3등으로 책봉되었다. 이듬해 좌승지가 되었는데 재상인 정철(鄭澈)을 위로하게 화근이 되어 파직당하였다. 곧 복직되었으나 다시 비난이 심해 신분이 위태롭게 되었는데, 대사헌 이원익(李元翼)의 도움으로 무사하게 되었으며 도승지로 승진하게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손수 촛불을 들고 앞장서서 피난길을 재촉하였다. 선조가 개성에 이르러 이조참의로 임명하였고, 다시 왕명을 받들고 신성군(信城君), 정원군(定遠君) 두 왕자를 호위하여 평양으로 갔다. 선조는 다시 형조판서로 임명하였다가 대사헌으로 영전시켰으며, 얼마 후에는 병조판서와 홍문관직제학을 겸하게 하였다. 왜적의 기세가 꺾여지지 않고 계속 진공하여 대동강을 압박하게 되자 다시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옮겼다. 여기서 민심을 수습하고 또 대신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구원병을 청하도록 왕에게 건의하였고, 한편으로는 바닷길로 관리를 파견하여 호남지방에서 군사를 모집하게 하였다. 이후 계속하여 지경연춘추관사, 동지성균관사, 좌빈객 등을 겸직하였으며, 명나라 지원군을 맞아 들였다. 1594년(선조 27) 병조판서와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직하였고, 다음해 이조판서,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의금부사, 우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1597년(선조 300 신병으로 인하여 잠시 직책에서 물러낫다가 후에 다시 병조판서로 복직되었는데, 임진왜란 이래 5번이나 병조판서로서 병권을 잡고 크게 활약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7년의 국난을 당하는 동안 동분서주하면서 전쟁 구면을 타개하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1598년(선조 31)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경연강춘추관사 오성부원군으로 임명되어 보국안민의 중추적 역할을 맡았으며,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9년(선조 32) 좌의정 다음해에 우의정에 전임되었고, 도원수로 도체찰사를 겸직하여 영남과 호남지방을 비롯한 여러 지역을 순회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구휼에 힘썼다.
1600년(선조 33) 영의정에 올랐으나 1602년(선조 35)다시 재연된 붕당 싸움으로 인하여 자진해서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는 붕당 싸움에서 학식이 높은 성혼(成渾)같은 인물이 비난당하자 이를 변호하다가 규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604년(선조 37) 다시 영의정에 복직 되었으나 사직하여 시기와 중상의 대상에서 모면할 수 있엇다. 선조가 승하한 이후에 새로 임명된 영의정 이원익을 도와 이덕형과 함께 좌◦우의정을 담당하였다. 특히 이덕형과의 관계가 밀집하여 관직을 서로 주고 받으면서 국사를 처리했다. 그리하여 이항복은 오성으로 이덕형은 한음으로 세상에 널리 이름이 알려졌는데, 두 사람 사이에는 수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1611년(광해군3) 우의정이 되었으나 1613년(광해군 5) 역적의 괴수를 천거했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인하여 사직서를 올리고 은거하였다. 1617년(광해군 9)인목대비의 폐모론이 대두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에 관직이 삭탈당하고 1618년(공해군 10)함경도 북청으로 귀양갔다.
1618년(광해군 10)사망하고 그해에 바로 복관되고 청백리로 선출되었다.
포천의 화산서원(華山書院),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신도비문은 이정구(李廷龜)가 지었고 김집(金集)이 썼다. 유고집으로 『백사집(白沙集)』,『북청일기(北淸日記)』가 전해온다.
 
 
성  명 :
양사언(楊士彦)  1517(중종12)~1584(선조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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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신◦문인◦서예가. 신북면 기지리에서 출생하였고, 일동면 길명리 금주산(金珠山) 아래에 묘가 있다.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碗邱)◦창해(滄海)◦해객(海客) , 본관은 청주(淸州). 공조전서(工曹典書) 진팔(振八)의 고손, 황해도 절도사 치(治)의 증손, 선교랑(宣敎郞) 제달(梯達)의 손, 돈영주부(敦零注簿) 희수(希洙)의 자이다.
문장이 뛰어나고 시(詩)에 능하며 필재(筆才)가 출중하여 형 사준(士俊). 동생 사기(士奇)와 더불어 당시 포천의 3걸(三傑)로 일컬어 졌다. 어린 때부터 선풍도골(仙風道骨)의 기상을 보였는데, 7살 때 어머니를 따라 서울 남산 및 초당에 살면서 학업에 전념하였다. 1540년(중종35) 진사시에 합격하고 1546년(명종1)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곧 바로 『운정기(雲亭記)』를 지어 명성을 떨쳤다. 이후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현감(三登縣監)◦평창군수(平昌郡守) ◦강릉부사◦함흥부윤 등을 역임하였는데 이렇게 외직을 두루 지낸 것은 자연의 경관과 산수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자원한 것에서 연유하였다.
한 때 성균관 사성(司成)을 역임한 후 다시 외곽으로 나가 회양군수(淮陽郡守)가 되었는데, 이 때 가마를 타고 자주 금강산에 드나들며 자연의 경승을 즐기면서 읊은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嶽 元化洞天)’이라는 글씨가 지금도 만폭동(萬瀑洞)바위에 새겨져 있다. 그 후 철원군수를 지내고 강릉부사를 제수받았는데, 재임시글 솜씨를 발휘하여 비문을 지었는 바, 그 비문이 돌에 새겨져 지금까지 전해져 오며,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그 탁본이 보존되어 있다.
그후 안변군수(安邊郡守)로 나아가 학교를 진흥시키고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보급, 풍속교화에 힘쓰고 선정을 베풀자 평안도감사가 이를 상신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당시 군민들에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큰 못을 파게하고 마초(馬草)를 많이 저장토록 하였다. 얼마 후 북쪽에서 변란이 일어나 많은 군사가 북진을 할 때 다른 고을에서 마초와 물이 없어서 관리나 백성들이 고초를 겪었으나 이곳만은 별다른 고통을 겪지 않아 만인들이 선각의 지혜에 탄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뒤에 안변 서곡면 능골에 있는 지릉(智陵 : 의조의 릉)에서 화재 책임을 추궁당해 해서(海西)로 유배되었다. 2년 후 귀양살이에서 풀려났으나, 심한 병에 걸려 적소(謫所)에서 죽었다.
세상에 전하기를 ‘비’ 자를 크게 쳐 놓고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 했고, 묘소에는 유품만을 매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당시 썼다는 ‘비’자 글씨는 현재도 종손이 보관해 오고 있다. 또 일설에는 사망 당시 동해빈(東海濱) 정자에 기거하였는데, 그 안에 ‘비’자를 크게 써 액자를 만들어 두었다. 하루는 큰 바람이 일어나 창문이 열리면서 글씨가 하늘 높이 날아가 바다에 떨어졌는데 그 때가 바로 적소에서 운명하던 시간과 일치하였다고 한다.
비상한 문재(文才)를 타고 난데다가 세상을 탈속한 고사(高士)의 풍이 있었으며, 남사고(南師古)에게 점복(占卜)을 배워 뒤에 임진왜란이 발생할 것을 예언하기도 했다고 한다. 시는 작위(作爲)없이 천의무봉(天衣無縫)하고 기발했다. 일찍이 금강산에 드나들면서 보고 느낀 바를 적은 『금강산유람기』가 있다. 특히 명필로서 초서와 큰 글자를 잘 써서 안평대군(安平大君) ◦김구(金九) ◦한호(韓濩)와 함께 조선전기의 4대 서예가로 불리워 진다. 저서로는 『봉래집(蓬萊集)』이 있고, 유묵으로 『미인별곡(美人別曲)』이 있는데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유적으로는 창수면 추동리의 금수정지(金水亭址) 강변 바윗돌에 ‘취대(翠臺)’, ‘경도(瓊島)’라고 새긴 글씨가 있고, 포천읍 자작리의 『유인선효우비(柳仁善孝友碑)』후면에 스스로 짓고 쓴 효우전(孝友傳)의 내용이 새겨져 있다. 가사로는 남정군(南征軍)에 종군하고 읊은 「남정가(南征歌)」가 있다.
묘갈명(墓碣銘)은 조경(趙絅)이 지었다.
 
 
성  명 :
홍유손(洪裕孫)  1431(세종13)~1529(중종24)
프로필 :
조선시대 시인◦학자. 포천에 거주하였다. 자는 여경(餘慶), 호는 소총(篠叢), 광진자(狂眞子), 본관은 남양(南陽). 부사 순치(順致)의 자, 김종직의 문인이다.
가세가 극빈하였으나 경사(經史)를 섭렵하고 자유분방한 기질로 얽매임이 없었다. 과거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향리의 역(役)을 벗고자 꾀하지도 않았는데, 1481년(성종12) 남양군수 채수(蔡壽)가 문장이 능한 것을 보고 역을 면하게 해주었다. 그러자 곧 영남으로 가서 김종직의 문인이 되었다. 이때 김종직은 “이 사람은 이미 안자(顔子)가 즐긴 바를 알고 있으니 학자들은 모두 본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1482년(성종 13) 봄에 조자지(趙自知)의 집에서 남효온(南孝溫), 이정은(李貞恩) 등과 같이 모임을 가졌다. 홍유손이 남효온에게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 벼슬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니 우리들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고 이름하고 산수를 즐기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니 남효온도 찬성하고, 일곱 사람이 쓸 수 있는 소요건(逍遙巾)과 술을 갖추어 며칠 후에 동대문 밖 성 밑의 죽림사이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죽림칠현이 모두 소요건을 하나씩 썼는데, 남효온은 두목이 되고 홍유손은 부두목이 되어 수천정(秀泉正), 무풍정총(無豊正漗), 우선언(禹善言), 조자지(趙自知), 한경기(韓景琦) 등 모두 일곱 사람이 함께 지냈다. 특히 홍유손은 세상의 명리를 구하지 않고 일생을 보냈으며, 죽림칠현과 더불어 노자◦장자의 학문을 토론하며 시를 나누었다. 남효온은 그를 평하여 말하기를 “학문은 칠원(漆圓)같고 시는 산곡(山谷)을 누빈다.’라고 하였다. 홍유손은 당시의 명류인 김시습, 김수온 등과 교유하며 시율로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홍유손은 스승 김종직은 영남학파의 거두로서 많은 문하생을 요직에 등용시켰다. 그러나 이들 신진 사람파는 유자광(柳子光), 이극돈(李克墩) 등 이전부터 조정에서 세력을 잡고 있던 훈구파와 심하게 반목 대립함으로써 뒷날 연산군 때에 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홍유손은 1498년(연산군 4) 무모사화에서 제일 먼저 화를 당했다. 유자광이 상소를 올려 “홍유손은 세상을 우습게 보고 도 그의 말은 허무맹랑하며 그의 술수는 비상하고 미친 선비들 7명과 모임을 만들어 소위 7현이라 일컬으니 심문하옵소서”하였다. 유자광이 홍유손을 미워하는 데에는 그가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사실이 주요 이유이지만, 다른 하나는 유자광의 아들 유방(柳房)이 홍유손의 일당과 어율려 다니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결국 홍유손은 붙잡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우선언은 갑산으로 유배되었으며 수천정 등은 홍유손을 스승처럼 대우하는 무리로 취급되어 각각 붙잡혀 취조를 당했다.
제주도로 귀양간지 11년 만인 1506(중종 원년)에 반정이 일어나서 풀려 그후 포천으로 이주하였다. 중종이 그를 불러 별전에서 부시9賦詩)를 짓게하니 그 문장이 절묘하였다.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보았으며 이때 나이 63세였다. 또한 벼슬에 뜻이 없어 다시 산수를 즐기며 세월을 보냈다. 한 번은 풍수를 즐기다가 석벽에 시를 지어 새겼는데, 이 시에서 홍유손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스스로 연호를 단제(檀帝)라고 분명히 밝힌 데서 민족정신이 얼마나 투철했는 가를 짐작할 수 있다.
홍유손은 독신으로 생활하다가 76세 때인 1524년(중종19)에 비로소 부인을 맞아들이고, 포천의 불정산 아래의 오작포(五作浦)에서 4년만에 아들을 낳앗는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해서 이름을 지성(至誠; 혹은 志誠)이라고 했는데 그의 나이 80세였다. 그후 100세가 넘도록 살았으며 저서로는 『소총유고(篠叢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  명 :
용주 조경(龍洲 趙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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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 주봉(柱峯),본관은 한양(漢陽)이다.
1586년(선조 19년) 10월 6일 한양 숭교방 홍덕동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는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후에는 모계(茅溪), 문위(文緯)의 문인(閒人)으로1612년(광해군4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나 광해조(光海朝)의 난세(亂世)에 과거와 벼슬을 단념하고 1616년 거창에 은거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유일(遺逸)로써 천거되어 고창(高敞) 현감(縣監)과 경상도사(慶尙都事)에 계속하여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다가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亂)이 평정된후 형조좌랑(刑曹佐郞)과 목천(木川,현 천안) 현감(縣監)을 지냈다.
162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壯元)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에서 정언(正言), 헌납(獻納)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播遷)하고 조정에서 화전(和戰)양론이 분분할 때, 지평(持平)으로 강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강경하게 논박하였다.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이조(吏曹)정란(正郞), 해서(海西).호남(湖南) 지방의 암행어사(暗行御史)를 거쳐,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간(司諫)으로 척화(斥和)를 주장하였고, 이듬해에는 집의(執義)로서 일본에 청병(請兵)하여 청(淸)나라를 공격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홍문관 전한(典翰) 재임시인 1643년 2월부터 11월까지 일본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오사카(大阪)와 에도(江戶)에서 왕명(王命)을 전하면서 일인(日人)들의 간교한 환대를 물리치고 일왕(日王)과 도쿠가와(德川)정권을 탁월한 시문(詩文)으로 감동시켰다.
1645년부터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홍문관.예문관 대제학(大提學), 형조판서(刑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 좌참찬(左參贊), 좌찬성(左贊成)을 두루역임하였다. 특히 이조판서 재임시 이도(吏道)를 쇄신하고 인재등용에 공정을 기해 명망(名望)을 얻었다.
장릉(長陵)의 지석문(誌石文)을 찬술(撰述)하면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아니한 것 때문에, 그리고 병자호란 후 청나라 사문사(査問使)의 척화신(斥和臣)에 대한 처벌 요구로 영의정 이경석(李景奭)과 함께 1650년(효종 1년)4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의주(義州)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유배 되었다가 풀려나 신묘삼권보(辛卯三卷譜) 의 서문을 썼다.
1655년 기로소(耆老所)에 들고, 661년(현종2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예송[禮訟, 현종-숙종대에 걸쳐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의 복상기간을 두고 율곡학파인 서인과 토계학파인 남인간의 정권 주도권을 둘러싼 이념논쟁]에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상소를 변호 하다가 대간(臺諫)의 논박을 받고, 파직 당하였다.
1669년 2월 5일 별세하였다. 배(配)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安東) 김씨(金氏1584-1650)와의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으며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만세교리 한바위 녹문산에 합장 하였다.
별묘(別廟)는 신북면 가채리에있다. 문정공(文靖公), 미수(眉叟)허목(許穆)이 묘지명(墓志铭).신도비명(神道碑铭).시장(諡狀)을 지었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춘천의 문암서원(文巖書院).흥해의 곡강서원(曲江書院)에 배양되었다. 글씨에 뛰어났고 [용주집(龍洲集)]과 일본 견문록인 [동사록(東傞錄)]을 남겼으며 포천인의 빛나는 발자취를 전하는 사찬(私撰) 군읍지인 최초의 [견성지(堅城誌)]편찬에 참여 하였다.
1676년(숙종2년)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문간(文簡)의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1695년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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